-
미국 내 흑인 인종차별의 상징적 사건. 리틀록 사건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5. 10. 23. 00:10300x250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 선언을 한 후 공식적으로 미국의 노예 제도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인종 차별의 악습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흑인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폭력과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으며, 흑인이 가면 안 되는 곳에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심지어 그중엔 투표소도 있었다.) 집이 불타거나 부서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1896년 퍼거슨이라는 흑인이 유색인종 전용칸으로 가라는 명령을 거부하자 그는 '인종 격리 차량법'위반혐의로 고발되었는데 이에 대해 퍼거슨이 낸 위헌소송에서 대법원은 "분리했을 때 각각의 시설이 똑같으면 괜찮다." 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수십 년간 식당과 기차, 화장실에서 인종분리가 일어났을 때 이 판결은 '유효'하고 '합리'적인 근거가 됐다. 심지어 한 방울의 피만 섞여도 유색인종으로 분류하는 'one drop' 법도 통용됐다. 1984년 루이지애나 법정은 230년 전 프랑스 노예 농장주와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이의 후예라는 이유로 누가 봐도 완연한 백인 여성을 ‘흑인’으로 판정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분리정책은 교육에도 이어졌는데 1954년 린다 브라운이라는 흑인 학생이 집에서 가까운 백인 학교에 가지 못하고 먼 거리를 통학해야 하는 것은 위헌이라며 소송을 냈고, 1954년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분리하지만 평등하다'는 논리는 이제 공교육 분야에서 설 자리가 없다. 분리한 교육 시설은 태생부터 불평등하다. 공교육에서의 흑백 분리 교육을 철폐하라."라는 판결이 내려진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브라운 판결'(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이다.
이렇게 공립학교 인종차별 금지 판결이 내려진 이후, 아칸소 주의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에 17명의 흑인 학생이 입학 신청을 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흑인 학생들이 학교에 나타났을 때 백인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 아칸소 주지사였던 오발 포버스는 한 술 더 떠서 주방위군과 경찰을 보내 흑인 학생들의 출입을 막았다. 결국 17명 중 8명은 위협에 못 이겨 입학을 포기했다. 하지만 9명은 꿋꿋하게 남았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는 사실 브라운 판결에 불만을 가졌다. 그는 인종 문제가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고 봤고 연방 정부가 민권 운동과 학교 인종 통합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 인종 통합이 사회적 불안을 야기한다고 보았으며 퇴임 후에도 당시 대법원장인 얼 워렌을 임명한 것을 "가장 바보 같은 실수였다." 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대통령 임기 중 단 한 번도 브라운 판결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흑인 사회는 그의 침묵에 실망감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리틀록에서 일어난 인종차별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칼을 빼들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법치주의와 헌법을 수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101 공수사단을 투입했다. 101 공수사단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한 정예 중의 정예로 이는 대통령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정치적 선택이었다.(여담으로 일부러 백인 병사들만 골라서 보냈다고 한다.) 101 공수사단 투입 후 이틀 만에 오벌 포버스 주지사는 백기를 들고 흑인 등교 금지를 철회했지만 시위대들은 남아있었다. 101사단 병력과 대통령의 지휘를 받는 아칸소 주방위군은 시위를 해산시켰고 학생들을 지켰다.
끝까지 학교를 다닌 9명의 흑인 학생들은 이후 리틀록 나인으로 불리며 흑인 인권 운동의 대표 사례로 기억되었다. 리틀록 9인이 재학한 센트럴 고등학교는 1992년 교정 전체가 국가사적지로 지정되었다. 2007년에는 리틀록 나인을 기리는 박물관이 개관했으며, 2017년에는 리틀록 나인 입학 50주년 기념 행사를 열었다.
리틀록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인 오벌 포버스는 리틀록 나인 멤버들이 졸업한 후 1년 후에 리틀록 고등학교를 폐쇄시켜 버려서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항간에는 깊게 생각 안하고 이렇게 사건이 크게 번질지 몰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반면 인종분리 정책을 지지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얻어 1958년 갤럽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10인의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래서 그에게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자 가장 미움받는 사람'이라는 이명이 붙었다.
이후 포버스는 1960년 대통령 선거에 나섰으나 처참한 성적으로 낙선했는데, 이후 기존의 강경 인종분리 정책 노선에서 벗어나 온건 정책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백인우월주의자들과 거리를 두었다. 1962년에는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백인 시민 협회와 결별해 주지사 3선에 성공하기도 했다. 1964년에는 흑인 유권자의 81%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 1988년 미국 대선 후보 민주당 경선에서는 흑인 인권운동가 출신 정치인 제시 잭슨을 지지해 세간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1968년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는 다시 한번 미국 공교육 역사상 의미 깊은 사건의 주무대가 되었다. 생물학 교사 수잔 에퍼슨이 '공립학교에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 교육을 금지한다'는 아칸소 주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소송을 했고, 미국 대법원은 "주 정부가 교육과 학습이 특정 종교 종파나 교리의 원칙이나 금지 사항에 맞춰져야 한다고 요구할 수 없다." 라며 판결했다. 이 판결은 학교에서 진화론 교육을 종교적 이유로 금지할 수 없다는 기념비적 판결이 되었다.300x250'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험 회사가 보험 지급을 거부하자 직접 의수를 만든 사람 (0) 2025.10.25 생명을 살리는 조혈모세포 기증 (0) 2025.10.24 10m까지 자라는 기생충. 광절열두조충(촌충) (0) 2025.10.22 우리나라가 마약투여자에게 심한 벌을 주지 않는 이유 (0) 2025.10.21 선박 진수식에서 샴페인 병을 깨트리는 이유 (1) 2025.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