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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벼의 역사, 그리고 아프리카에서의 부활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5. 11. 1. 00:10300x250

통일벼는 1970년대 한국에서 개발한 벼 품종이다. 1960년대 정부에선 식량난 및 식량자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에 식량증산을 위한 신품종 쌀 개발에 착수했다. 그 과정에서 이집트의 열대성 자포니카 품종인 나다(Nahda)를 이집트에서 밀반입해서 개량한 희농 1호(박정희 대통령이 자기 이름을 붙일 정도로 기대가 컸다) 등의 실패사례도 있었지만, 농촌진흥청 주도로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에 파견된 서울대학교 허문회 교수팀이 한국인이 먹는 자포니카(Japonica)와 다수확 품종인 인디카(Indica)를 교배하여 IR667 품종을 개발한 것이 바로 통일벼이다.
통일벼는 ‘기적의 쌀’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까진 인디카와 자포니카의 교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허문회 교수팀은 잡종불임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고, 수대에 걸쳐 자가교배를 실시하는 한편 이 품종을 제3의 품종과 교배하는 매개교잡을 통해 불임을 해결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는 세계 벼 육종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통일벼는 키가 작아서 태풍과 병충해에 강했고, 무엇보다 생산량이 기존 볍씨 대비 30% 이상 많았다. 다만 재래 품종에 비해 내랭성이 낮기 때문에 보온못자리가 필요했고, 충분한 양의 비료와 물이 공급되어야 했다. 기존 벼농사 대비 못자리 설치, 모내기 시기도 앞당겨져야 했다. 줄기의 키가 작기 때문에 볏짚이 짧아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만들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기존의 자포니카 계열에 비해 떨어지는 밥맛이 가장 큰 문제였다. 찰기가 떨어져 밥맛도 다소 푸석푸석하고 밋밋한 편이다. 하지만 박정희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박정희를 포함해 정부 각료가 참여한 통일쌀 시식회에서 참석자의 28%인 11명만이 밥맛이 ‘좋다’고 무기명 투표했지만 박정희는 투표 용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좋다’고 표기했다.) 빠르게 확산됐다. 통일벼를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에 수매하는 등의 지원책도 이어졌다. 이후 밥맛 등을 개선한 후계 품종들도 여럿 선보였다. 결국 1977년 경에는 전국 논의 대부분이 통일형 품종이 되었고 정부에선 생산량이 국내 수요를 초과하여 해외 수출도 하게 되었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하기도 했다.
물론 문제점도 있었다. 일단 맛이 없다는 것이 일차적 문제였고, 정부에서 통일벼 생산을 밀어붙이면서 농민들에게 통일벼 생산을 강요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집집마다 목표치가 정해졌고 마을마다 증산 목표량이 정해졌다. 공무원들이나 면장이 통일벼가 아닌 모판을 엎어버리거나 이미 심은 벼를 뽑아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농민들은 정부의 강압적인 처사에 강력하게 반발했고 몰래 재래종을 키우는 일도 있었다. 지방의 농민들 사이에선 "맛있는 품종은 경기도에 보급하고 영호남에는 맛없는 품종을 보급한다."는 루머도 돌았다. 일본에서 몰래 종자를 들여와 자기 논에 파종하는 농민도 생겼다. '정부미는 맛없다'라는 인식도 생겼다. 하지만 '질보다 양'을 선택한 정부의 정책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쌀 자급에 성공했고 혼분식 장려 운동이나 무미일 같은 정책도 자연스럽게 폐지됐다.
이렇게 위세를 떨쳤던 통일벼는 80년대에 들어오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1978년 도열병이 심하게 돌아 통일벼 생산이 크게 떨어졌고 바로 다음 해인 1979년에는 호우와 홍수로, 다음 해인 1980년부터 3년간 최악의 냉해가 계속되었다. (위에서 언급했듯 통일벼는 냉해에 취약하다) 도열병 파동으로 정부는 '한 가지 쌀 품종만 심으면 병해에 타격을 입으면 큰일 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고 식량난이 해소된 80년대 후반부터는 맛이 떨어지는 통일벼는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했다. 정부도 통일벼 강제정책을 폐기했다. 생산성과 맛 두 가지 토끼를 모두 잡은 품질 좋은 개량된 벼 품종도 많이 개발되었다. 무엇보다 쌀 생산량이 너무 많아지면서 더 이상 쌀을 무조건 많이 생산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게 되었다.
이렇게 잊혀졌던 통일벼는 21세기에 아프리카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시작은 마다가스카르였다. 당시 대우로지스틱스에서 마다가스카르가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을 틈타 영토를 구매한 것이 논란이 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통일벼 재배 시험을 했는데 예상보다 성과가 좋자 종자 요청이 쇄도했다. 이후 농촌진흥청에서 '한-아프리카 농식품기술협력협의체'를 공식적으로 출범하고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종자 보급과 개량, 농법 보급 등을 추진하게 되었다. 통일벼의 냉해에 약하다는 단점은 아프리카에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2모작도 가능했다. 한국인들에게 맞지 않는 밥맛도 아프리카 쪽에서는 딱 맞았다. 무엇보다 현지의 품종과 농법을 이용하는 것보다 최소 2배부터 최대 4배까지 더 많은 수확량을 거두게 되었으니 아프리카 국가들 입장에선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K-라이스벨트'라고 붙여진 이 사업을 통해 가나, 감비아, 세네갈, 기니, 카메룬, 우간다 등에 시범적으로 통일벼가 심어졌는데 2024년에만 당초 목표인 2,040톤을 14% 상회하는 2,321톤을 최종 수확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K-라이스벨트 사업은 2027년부터는 연간 1만 톤의 다수확 벼 종자를 생산하고 농가에 보급함으로써 아프리카 대륙 인구 3000만 명에게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국가들의 호응도 매우 높다고 한다. 이들은 쌀 자급률이 55%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나머지를 수입에 의존해야 해서 재정부담이 심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손해만 보는 장사도 아닌 것이 일단 이쪽 나라들에 대한 대한민국의 인지도나 위상이 좋아질 수밖에 없고, 이를 빌미로 다른 기업들의 진출에도 긍정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이들 국가들이 한국산 종자와 농법에 맞추어 쌀 생산을 하는 것이 궤도에 오르게 되면 한국산 비료와 농약, 농기계를 계속해서 판매할 시장도 개척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300x250'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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