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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시대 법의학 발전
    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6. 2. 1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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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의학이 가장 발달했던 것은 중국이었다. 중국이 법의학이 발달한 것은 송나라 때부터라고 한다. 송나라는 다민족 국가로 수많은 인구를 통치하기 위해 엄정한 법질서가 필요했다. 강력한 법치국가였기에 살인 사건에 대한 과학적 조사가 필요했고 그러다 보니 법의학이 발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1247년 송자가 편찬한 '세원집록(洗冤集錄)'으로 세계 최초의 법의학 전문서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검시 법령, 사인 분석, 시신 검사법들을 다루는데 이후 원, 명, 청대까지 검시의 표준 지침서로 활용되었다. 또한 서양으로 넘어가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서양 법의학자들 사이에 지침서로 활용되었다. (당시 서양은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던 중세시대로 종교적 이유로 사체를 해부하는 것이 불가능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부터 중국의 영향을 받아 검험(檢驗) 제도라고 불린 법의학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세종때부터 법의학 지식이 재판에 활용되었으며, 관리들에게 검시를 할 때 필요한 지식을 보급하기 위해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였고, 부검제라는 검시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밖에 법의학에 관한 많은 서적을 발간하였는데, 이 책들이 후일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법의학의 기틀이 되었다.

     

    신주무원록은 1341년 원나라의 왕여가 쓴 무원록(無寃錄)이 원본이다. 무원록은 말 그대로 원한을 없앤다는 뜻으로 억울하게 죽은 망자의 원한을 풀어 주어 원한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1440년 세종이 왕여의 무원록을 재편집해 '신주무원록'을 펴냈으며, 이후 영조가 '증수무원록대전'을 편찬했다. 1970년에는 정조가 한문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증수무원록언해'를 발간했다.

     

    검시는 사람이 사망했을 때 죽은 원인을 밝히기 위해 담당 관원이 시체를 검증하고 관련자를 조사해 검안(檢案)을 작성했는데, 초검과 복검 두 차례 실시했으며, 검험관 간에 이견이 있을 경우 삼검, 사검도 행해졌다. 검험관은 한성부에서는 한성부 및 오부의 관원이, 지방에서는 수령이 맡았다. 이러한 조선시대 검험에 관한 사항은 속대전, 대전통편 등에 규정화되었다.

     

    유교사상이 짙었던 조선시대의 수사 과정은 쉽지 않았다. 시신이 매장됐을 때, 땅에서 파내 수사를 진행해야 했으나 유족들이 반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범인들은 수사를 방해할 목적으로 살해 후 시신을 바로 매장하기도 했다고 하며, 이를 막기 위해 정조는 '매장한 시신을 다시 파내러 검험하는 '굴검'이라는 법을 제정했다.

     

    검시할 때 사용하는 도구 및 재료인 응용 법물로는 술, 식초, 소금, 매실, 관척, 닭, 은비녀 등이 있다. 그밖에 죽은 사람의 상처를 헤아리기 위한 동제검시관척(銅製檢屍官尺)을 만들어 형조와 한성부 및 각 도에 보내어 사용하도록 하였다.

     

    순조 22년인 1822년 정약용은 살인 사건 관련 법규와 판례를 정리한 '흠흠신서'를 저술하여 과학적 수사와 법의학 지식에 기반한 공정한 재판을 강조했다. 흠흠신서는 살인 사건 심리 실무지침서이자 한국 법제사상 최초의 법의학 및 판례 연구서이다. 정약용이 유배 중 저술한 이 책은 '삼가고 또 삼간다'는 뜻의 흠흠(欽欽)을 제목으로 삼아 억울한 죄인을 없애기 위해 작성된 30권 10책의 형법서로, 당시의 과학적 수사 방법과 법리 해석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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