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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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흑인 용병 부대 해귀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11. 6. 00:10
해귀(海鬼).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 파견군 장수인 팽신고가 소개한 흑인 용병. 팽신고에 따르면 해귀는 호광(湖廣)의 남쪽 끝에 있는 파랑국(波浪國) 사람들로, 바다를 세 번 건너야 호광에 이르는데 조선과의 거리는 15만 여 리 된다고 한다. 조총을 잘 쏘고, 여러 가지 무예를 지녔으며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을 공격하고 며칠 동안 물속에 머물면서 수중생물을 잡아먹는다고 소개했다. 여기서 파랑국은 지금의 포르투갈을 뜻하며 해귀들은 포르투갈의 속국이었던 모잠비크 출신의 흑인 노예들이었다. 팽신고는 해귀 3명을 선조 임금 앞에서 소개했고 선조는 이들의 무예를 구경한 뒤 상금으로 은자 한 냥을 선사했다고 한다. 해귀는 당시 문서 곳곳에 소개되는데 키가 매우 커서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다닐 정도였으며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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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의 역사와 유래, 고추의 매운맛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10. 23. 00:10
멕시코가 원산지인 고추는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1492년 원주민이 재배하고 있던 고추를 당시 매우 고가에 거래되던 향신료인 후추로 착각한 콜럼버스는(혹은 다른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면피하기 위해 후추보다 더 좋은 향신료라고 면피했다는 설도 있다) 그것을 유럽으로 가져온다. 이후 콜럼버스가 가져온 고추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전해졌다. 고추를 아시아로 전한 나라는 스페인 혹은 포르투갈이다. 스페인은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중심으로 인도와 중국, 인도네시아에 고추를 소개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포르투갈은 아랍과 인도, 일본에 먼저 알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최소 두 나라 중 하나가, 혹은 두 나라 모두가 고추를 아시아로 전파했다고 보고 있다. 그 밖에도 여러 설이 있다. 고추가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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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건당 황대중과 그의 애마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10. 13. 00:10
양건당 황대중(1551~1597). 조선의 의병장. 신체적인 장애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했다. 조선시대에 드문 장애인 장수이다. 황희 정승의 5대손으로 한성에서 태어났으나 영암군수로 부임하던 할아버지를 따라 강진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학질에 걸려 인해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황대중은 자신의 왼쪽 허벅지 살을 베어내어 어머니의 약재로 쓰게 했다고 하며 이후 다리가 불편해져서 절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후 그의 효심을 기려 효건(孝蹇)이라 불렀다. 황대중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의 효심을 기려 조문객이 십리 밖까지 줄을 섰다고 한다. 그의 효심을 들은 선조가 정릉 참봉에 천거하였으나 고사하였다고 한다. 황대중은 절름발이였지만 활쏘기와 무예가 뛰어났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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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조선의 신병기 비격진천뢰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10. 6. 00:10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군이 사용한 포탄. 우리나라 최초의 시한폭탄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에서는 무기를 제조하던 군기시에서 신무기 개발을 진행하였다. 당시 군기시에서는 왜군이 사용하던 조총을 만들거나 명나라 군대가 가지고 온 중국의 화포를 뜯어서 분석하며 신병기를 개발했는데 그 와중에 개발된 것이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유일한 시한신관을 가진 폭발형 포탄 비격진천뢰였다. 화포장 이장손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비격진천뢰를 왜군은 ‘귀신폭탄’이라 부르며 무서워했다. 징비록에는 “하늘이 우리나라를 복되게 하여 옛날에는 없던 병기를 주었다.“고 적혀 있으며, 일본 측 자료인 정한위략에 따르면 ”스스로 폭발하여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깨어져 별처럼 쏟아지니 이에 맞은 자는 곧 죽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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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삼지창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4. 5. 00:20
엄밀히 말하면 갈래창의 일종인 삼지창과 당파는 비슷한 모양이긴 하지만 그 근본이 다르다. 날이 3개, 혹은 4개 달린 갈래창은 원래 농어업이나 수렵도구에서 발전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다. 조선 초에 만들어진 '국조오례의'에서는 극(戟)이라 하여 삼지창의 일종을 소개했는데 나무자루는 붉게 칠하거나 검게 칠하고 길이는 1장 6척(약 336cm)에 달했다. 조선 후기에는 주로 국왕의 의장행렬이나 관아의 의장물로서 사용되었는데 군왕과 관아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상징물이었다. 물론 본격적으로 사용된 건 아래 서술한 임진왜란을 겪은 후의 조선 후기였다. 당파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받아들이면서 도입한 병기이다. 왜구가 쳐들어오자 명나라는 일본군의 특성을 감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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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까지 한량처럼 보냈던 명장 권율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2. 26. 00:10
권율의 집안은 조선 개국공신인 권근이 6대조이고 아버지 권철은 영의정을 역임한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다. (참고로 권철은 오성과 한음의 감나무 일화에 나오는 옆집 대감님이다. 이항복의 비범함을 어여삐 여겨 자신의 손주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권철의 막내아들이었던 권율은 나이 40이 되도록 관직에 나서지 않고 지인과 어울려 전국을 여행하거나 지리를 연구하는 등 한량처럼 지내다 아버지의 사망 이후 과거 공부를 시작, 선조 15년인 1582년 그의 나이 46세 때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사위 이항복보다 급제가 2년이나 늦었다) 집안 덕을 보았는지 승진이 빨라 의주 목사까지 되었는데 베이징에 갔던 역관들의 유언비어로 해직되었다고 한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래도 이 사람이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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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억울하게 죽은 신각. 그리고 김명원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4. 1. 24. 00:20
신각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임진왜란 발생 시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부원수로 한강 방어에 실패하고 양주로 후퇴한 후 유도대장 이양원,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과 합류하여 양주 해유령 근처에서 왜군 소부대를 기습 7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는 임진왜란 중 최초의 육지 전투 승리였다. 그러나 당시 파천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김명원과 신각이 연락이 끊어진 상황에서 '신각이 이양원을 따라간다는 핑계로 도망쳤으니 국법으로 다스려 주시옵소서'라는 장계를 올렸고 당시 조정에서는 많은 장수들이 도망가고 있는 상황에서 본보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에 신각에 대한 처형을 결정해 버렸다. 이후 해우령 전투에 대한 승전보가 조정에 도착하여 조정에서는 신각에 대한 처형을 중지하라며 선전관을 파견하나 선전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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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선조는 이순신을 견제했을까?부연설명 - 정보와 상식 2023. 11. 14. 11:28
사실 선조가 이순신을 견제한 것은 당시 왕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름 이치에 맞는 행동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애초에 조선부터가 장수의 쿠데타로 세워진 국가이기 때문에 이순신도 같은 행보를 걸으면서 왕실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선조가 이순신을 파직하고 백의종군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된 계기는 1597년 가토 기요마사의 부산 상륙이었다. 당시 선조는 이중첩자인 요시라를 통해 가토의 도해 계획을 전달받아 이순신에게 이를 공격하라고 비밀 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순신은 가토의 함대를 영격하지 않았고 결국 가토는 부산에 상륙하게 되었다. 이순신이 왕명을 따르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이순신이 남해현에 공무차 들어갔다가 풍랑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설과 당시 이순신이 선..